2020/09/30

출산의 기록: 안녕 아빠딸

"배가 많이 아프다."
새벽 4시 반 즈음 옆에서 자던 아내의 말 한 마디에 눈이 번뜩 뜨였다.

 

드디어!!

 

곧 출산이라는 느낌이 왔다. 전날 배가 아파서 산부인과에 갔더니 아직 좀 더 지켜봐도 될 것 같다고 집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고, 마침 저녁을 먹고 난 뒤부터는 통증이 더 심해졌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놨었던 출산 가방을 낚아채서 바로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출산 기록 (1)

건강하게만 있어 주길 바라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매달 있던 정기 검진 때는 항상 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늘 등 돌리고 있는 모습만 봤었다.
어쩌다 한 번 함께 못 간 날에
"얼굴 봤어" 라고 하던 아내의 말에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근데 잠깐이긴 해" 라며 한마디 더 거들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슬슬 얼굴 보여주겠지?"
병원을 향하며 매번 아내와 나눴던 대화가 검진 날 하나의 재미였다.

출산을 코앞에 둔 마지막 검진에서야 처음 얼굴을 보여주던 그 날, 4d 초음파 화면에 찰흙 인형처럼 뭉개져 보여도 아빠딸이라서 예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출산 기록 (2)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적한 새벽 도로를 달리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잠시 신호 받았던 걸 가지고 도로가 많이 막히는 것 같은 조급함이 생겼다.

첫 출산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것저것 걱정이 돼 큰 병원에서 낳기로 하고 이곳으로 다녔었는데,
항상 북적거리던 이 큰 병원이 인기척도 별로 없이 조용해지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오랜 병원 생활하던 때가 기억나기도 하고 그랬다.

간호사, 의사와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진통이 온 게 맞고 때가 되긴 했는데, 아기가 아직 내려올 준비가 덜 된 모양이라고 했다.

지금부터 병원에 있어도 되고 아니면 오후부터 입원해도 된다고 했다. 첫째니까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했다.

아내는 진통이 오는 와중에도 지금부터 병원에 있으면 지겨울 것 같다고 했다.
역시 역마살. 워킹홀리데이에서 만난 인연이다. 

그래서 병원을 떠나 다시 나온 바깥은 동이 터 있었다.
걸으면 아기가 금방 내려온다고 하니 일단 걷기로 했다.

출산 기록 (4)

조금 걷자 아내는 새벽보다 진통이 심해진 모습이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출산 기록 (5)

뭔 애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밖에서 놀고 있어?
아침은 먹었나? 라며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웃다가 또 울다가, 주기적으로 오는 진통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출산 기록 (6)

한시간을 다시 달려 집으로 와 샤워도 하고 좀 누워있다가, 길 막히기 전에 돌아가자 하고 출발하여 저녁밥 시간에 맞춰 입원했다. 진통에 입맛이 없는지 많이 먹지도 못하고 거의 남겼다.
어제저녁 첫 진통이 시작되고 딱 24시간이 지났다.
이때만 해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첫째라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출산 기록 (7)

그러나 상황은 변하지 않은 채 하룻밤을 넘겼다.
난 소파에 누워서 졸기도 하고 했는데, 끙끙거리면서 밤새 잠도 못 잔 아내가 안쓰러웠다.
진통 때마다 허리를 쓸어달라고 했다.
훗날 말하길 그때 허리 만져주던 게 가장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 촉진제를 쓰기로 했다.
어제부터 쭉 봐왔기 때문에 진통 주기가 빨라졌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허리 만져주는 거 밖에 해줄 게 없어서 열심히 쓸어내렸다.

아내는 제왕절개로 출산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나도 이만하면 됐다고 맞장구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겠냐고 회진 온 담당의에게 물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출산 기록 (3)

이제 곧 나오겠지, 곧 나오겠지 하며 버텨내길 또 한나절.
저녁 6시가 좀 지난 무렵,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아기와 산모를 위해서 긴급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지어졌다.
촉진제를 써도 쉽게 열리지 않던 자궁,
터진 양수, 아기 머리의 위치, 떨어진 아기 심박수,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만 향한 것이다.

아내는 열심히 버텨줬는데,
보람은 느끼지 못하고 버티기만 하고 끝나게 됐으니 아내가 풀이 죽을까 걱정됐다.
근무 교대한 간호사와 조산사가 수술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번째 보는 교대 모습이었다.
어제 아침에 처음 왔을 때 봤던 분들이 대다수였다.
아직이냐며 너무 고생한다며 아내에게 한 마디씩 해줬다.

저녁 8시 즈음 수술실에 들어갔다.
엊그제 저녁 일곱시부터 시작된 진통이 꼬박 이틀 걸려 끝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출산 기록 (8)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 8시 47분.
드디어 만났다.
먼 길 돌아온 아빠딸과.

출산의 기록 아빠딸 (1)

양가 부모님께 전화로 연락을 드리고 나니 아내와 아기가 병실로 왔다.

출산의 기록 아빠딸 (2)

쭈글쭈글했던 손

출산의 기록 아빠딸 (3)

쭈글쭈글했던 발

출산의 기록 아빠딸 (4)

아기도 지쳤는지 잠들어있었다.
탯줄이 엉켜있었다고 했다.
여태 괜찮았는데 출산을 앞두고 감겼나 보다.

출산의 기록 아빠딸 (5)

간호사가 들어와서 젖 먹여야 한다고 망설임 없이 아기를 깨웠다.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싶었다.

애가 젖 먹는 동안 아내에게 제왕 절개해서 속상하냐고 물으니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풀이 죽어있을까 했던 건 괜한 걱정이었다.

밤늦게까지 셋이 놀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토마토에 물 주고 소풍 기다리는 애처럼 얼른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며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병원에 가보니
아내는 장군처럼 세상 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밥 잘 먹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면 많이 아파서 배앓이한다던데.

"어제 엊그제 생각하면 이건 무통이야" 란다.

원래 통증에 강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더 진화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