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의 기록: 안녕 아빠딸
"배가 많이 아프다."
새벽 4시 반 즈음 옆에서 자던 아내의 말 한 마디에 눈이 번뜩 뜨였다.
드디어!!
곧 출산이라는 느낌이 왔다. 전날 배가 아파서 산부인과에 갔더니 아직 좀 더 지켜봐도 될 것 같다고 집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고, 마침 저녁을 먹고 난 뒤부터는 통증이 더 심해졌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놨었던 출산 가방을 낚아채서 바로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건강하게만 있어 주길 바라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매달 있던 정기 검진 때는 항상 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늘 등 돌리고 있는 모습만 봤었다.
어쩌다 한 번 함께 못 간 날에
"얼굴 봤어" 라고 하던 아내의 말에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근데 잠깐이긴 해" 라며 한마디 더 거들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슬슬 얼굴 보여주겠지?"
병원을 향하며 매번 아내와 나눴던 대화가 검진 날 하나의 재미였다.
출산을 코앞에 둔 마지막 검진에서야 처음 얼굴을 보여주던 그 날, 4d 초음파 화면에 찰흙 인형처럼 뭉개져 보여도 아빠딸이라서 예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적한 새벽 도로를 달리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잠시 신호 받았던 걸 가지고 도로가 많이 막히는 것 같은 조급함이 생겼다.
첫 출산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것저것 걱정이 돼 큰 병원에서 낳기로 하고 이곳으로 다녔었는데,
항상 북적거리던 이 큰 병원이 인기척도 별로 없이 조용해지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오랜 병원 생활하던 때가 기억나기도 하고 그랬다.
간호사, 의사와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진통이 온 게 맞고 때가 되긴 했는데, 아기가 아직 내려올 준비가 덜 된 모양이라고 했다.
지금부터 병원에 있어도 되고 아니면 오후부터 입원해도 된다고 했다. 첫째니까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했다.
아내는 진통이 오는 와중에도 지금부터 병원에 있으면 지겨울 것 같다고 했다.
역시 역마살. 워킹홀리데이에서 만난 인연이다.
그래서 병원을 떠나 다시 나온 바깥은 동이 터 있었다.
걸으면 아기가 금방 내려온다고 하니 일단 걷기로 했다.
조금 걷자 아내는 새벽보다 진통이 심해진 모습이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뭔 애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밖에서 놀고 있어?
아침은 먹었나? 라며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웃다가 또 울다가, 주기적으로 오는 진통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한시간을 다시 달려 집으로 와 샤워도 하고 좀 누워있다가, 길 막히기 전에 돌아가자 하고 출발하여 저녁밥 시간에 맞춰 입원했다. 진통에 입맛이 없는지 많이 먹지도 못하고 거의 남겼다.
어제저녁 첫 진통이 시작되고 딱 24시간이 지났다.
이때만 해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첫째라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하지 않은 채 하룻밤을 넘겼다.
난 소파에 누워서 졸기도 하고 했는데, 끙끙거리면서 밤새 잠도 못 잔 아내가 안쓰러웠다.
진통 때마다 허리를 쓸어달라고 했다.
훗날 말하길 그때 허리 만져주던 게 가장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 촉진제를 쓰기로 했다.
어제부터 쭉 봐왔기 때문에 진통 주기가 빨라졌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허리 만져주는 거 밖에 해줄 게 없어서 열심히 쓸어내렸다.
아내는 제왕절개로 출산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나도 이만하면 됐다고 맞장구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겠냐고 회진 온 담당의에게 물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곧 나오겠지, 곧 나오겠지 하며 버텨내길 또 한나절.
저녁 6시가 좀 지난 무렵,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아기와 산모를 위해서 긴급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지어졌다.
촉진제를 써도 쉽게 열리지 않던 자궁,
터진 양수, 아기 머리의 위치, 떨어진 아기 심박수,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만 향한 것이다.
아내는 열심히 버텨줬는데,
보람은 느끼지 못하고 버티기만 하고 끝나게 됐으니 아내가 풀이 죽을까 걱정됐다.
근무 교대한 간호사와 조산사가 수술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번째 보는 교대 모습이었다.
어제 아침에 처음 왔을 때 봤던 분들이 대다수였다.
아직이냐며 너무 고생한다며 아내에게 한 마디씩 해줬다.
저녁 8시 즈음 수술실에 들어갔다.
엊그제 저녁 일곱시부터 시작된 진통이 꼬박 이틀 걸려 끝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 8시 47분.
드디어 만났다.
먼 길 돌아온 아빠딸과.
양가 부모님께 전화로 연락을 드리고 나니 아내와 아기가 병실로 왔다.
쭈글쭈글했던 손
쭈글쭈글했던 발
아기도 지쳤는지 잠들어있었다.
탯줄이 엉켜있었다고 했다.
여태 괜찮았는데 출산을 앞두고 감겼나 보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젖 먹여야 한다고 망설임 없이 아기를 깨웠다.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싶었다.
애가 젖 먹는 동안 아내에게 제왕 절개해서 속상하냐고 물으니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풀이 죽어있을까 했던 건 괜한 걱정이었다.
밤늦게까지 셋이 놀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토마토에 물 주고 소풍 기다리는 애처럼 얼른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며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병원에 가보니
아내는 장군처럼 세상 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밥 잘 먹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면 많이 아파서 배앓이한다던데.
"어제 엊그제 생각하면 이건 무통이야" 란다.
원래 통증에 강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더 진화해있었다.